[무령왕의 역사] 백제 무령왕에대해 너는 얼마나 알고 있니?
- 교육자료
- 2020. 5. 4.
백제 무령왕에대해 너는 얼마나 알고 있니?
백제 무령왕의 역사
1. 왕실과 귀족 세력의 무장해제
- 동성왕이 자객의 손에 살해가 되자 그 뒤를 이어서 40대의 무령왕이 추대가 되었다. 어느덧 백제의 25대 왕이 역사 속에서 이름을 올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이고, 8척에 달하는 큰 키와 빼어난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성품 또한 인자하고 관대하였다니 준비된 성군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무령왕의 혈통 관계 역시나 선대의 왕들처럼 불명확함을 보이게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자로 기록을 한데 비해,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이복 형으로서 기록을 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의 지석에는 삼근왕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무령왕은 즉위 이듬해 정월, 동성왕을 시해를 하고 가림성에 농성 중인 백가를 토벌을 하였다. 겁에 질리게 된 백가가 무령왕에 항복을 하였지만, 가차 없이 참수를 하여 그 머리를 백마강에 던져버렸다. 조정을 혼란에 빠뜨린 데에 대한 보복이었다.
난을 수습을 한 무령왕은 풍부한 경륜을 바탕으로 하여 국정 장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특히나 신구 귀족 세력의 반란을 차단을 하려고 애를 썼다. 백가의 머리를 백마강에 던지게 된 것도 귀족들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가 있게 되었다. 무령왕의 국정 장악은 점차적으로 성과를 거두게 되며 강력한 왕으로서 백제를 통치를 하게 된다.
특히나 무령왕은 특정 귀족 가문에 연연하지 않고 두루 인재를 기용을 하여 화합의 정치를 유도를 하였다. 왕실과 귀족 세력을 효과적으로 조율을 하게 되면서 안정이 된 조정을 이끌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솔 해명, 달솔 우영, 좌평 인우 등이 무령왕 집권기에 기용이 되어 백제의 번영을 도왔다. 보국안민의 뜻을 품고 있던 무령왕은 가뭄기에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열어서 구제를 하게 되었고, 농사에 필수적인 제방을 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라 안의 놀고 먹는 자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여 민생안정을 꾀하게 되었다. 군, 관, 민의 합심을 통해서 백제의 번영을 이끈 무령왕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는 대목이다.
2. 무령왕의 영토 회복 전쟁
- 나라의 안정을 도모를 하게 되면서 무령왕은 주변 국가들과의 분쟁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즉위년 11월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수곡성을 선제 타격을 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와의 계속된 승리로 인해서 방만하게 국경을 관리를 하던 터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를 찔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백제군은 크게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로 곧바로 퇴각을 하였다. 503년에는 고구려에 예속이 된 말갈이 고목성으로 쳐들어오게 되자 무령왕은 군사 5천 명으로 방어를 하였다. 이어서 전염병이 돌고 가뭄이 극심하던 506년에도 말갈족이 고목성을 다시 재침하였다.
말갈족은 고목성을 부수고 600명의 백성을 죽이거나 납치를 해 갔다.
무령왕은 거듭되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를 하고자 507년 장령성을 쌓았다. 그 해 10월 고구려의 장수 고로가 말갈과 합세를 하여 한성을 치려고 횡악 부근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무령왕은 군사를 보내 이를 물리쳤다. 백제가 양나라에 조공을 보낸 512년에는 고구려가 가불성과 권산성을 점거를 한 뒤에 약탈을 자행을 하였다. 이에 무령왕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서 위천의 북쪽으로 진격을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523년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로 하여금 쌍현성을 쌓아서 고구려의 방어에 심혈을 기울엿다.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자, 양나라는 '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고구려와 접전을 벌이게 되면서도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무제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는 한편, 왜의 게이타이 일왕에게는 동경을 하사를 하였다. 또한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왜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를 하였다. 안정된 왕권을 토대로 하여 백제를 이끈 무령왕은 523년, 62세의 나이에 붕어를 하였다. 혼란기에 백제를 바로잡으며 성왕의 중흥기에 단초가 된 성군이었다.
특히 무령왕릉이 1971년 공주시에서 발견이 되어 후세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여기에서는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들이 출토가 되었는데, 삼국 시대의 무덤들 중에서 최초로 묻힌 사람과 매장 연도가 확인이 된 무덤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수많은 국보급 부장품은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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